젊은 벗에게,
“회색인들의 사회”
일제 강점기 이래 우리 사회의 교육과정에서 배제된 것 중 하나가 자율성의 가치입니다. 군국주의 일본이 식민지 노예들에게 자율성을 가르치지 않았던 것은 차라리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당시 학교는 일왕에게 무조건 충성하라는 타율적 질서의식을 형성하는 곳이었습니다.
문제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나라의 정체성을 규정한 뒤에도 반공, 안보, 국가경쟁력이라는 지배 이데올로기로 사회구성원들에게 기존체제에 복종하는 의식, 즉 타율적 질서의식만 주로 형성했다는 점입니다. 해방되었다고 하지만 군사학교를 본뜬 학교 구조가 바뀌지 않았듯이, 학교는 코흘리개 때부터 “앞으로 나란히!”로 시작되는 질서의식을 내면화하는 장소로 남았습니다. 그 위에 경제지상주의와 물신주의가 팽배하면서, 결과가 모든 수단과 방법을 정당화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자율성이 없고 자기성찰을 하지 않는, 잘못을 반성할 줄 모르고 부끄러워 할 줄도 모르는, 뻔뻔한 회색인들의 사회가 되었습니다.
황우석이라는 신종 우상에게 경배하기에 바빴던 군상들, 정치인들, 주류언론의 인사들, 그리고 거기에 맞장구를 처댄 누리꾼들… 그러나 그들 중 자기성찰과 자기반성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을 찾기 어렵습니다. 남 탓하기에 급급하거나 슬그머니 빠지는 비겁한 행태를 보여줄 뿐입니다.
회색은 검정색 바탕에서는 흰색으로 보입니다. 반면에, 흰색 바탕에서는 검은 색으로 보입니다. 자율성이 없고 자기성찰을 하지 않는 회색인들은 올곧음을 배격하며 정직성 앞에서는 비겁합니다. 주위에 올곧음과 정직성의 청백이 있을 때 자신의 회색이 검정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직장에서나 군대에서나 학교사회에서나 모두 청백한 사람을 왕따시킵니다. 그리곤 “세상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군”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있나” “좋은 게 좋은 거야”라고 말합니다. 그러다가도 여차할 때엔 주위에 검은 사람이나 세력이 나타났다고 아우성을 칩니다. 주위의 검정을 강조하면서 자기들이 희다는 점을 드러내기 위함인데, 조중동 등 주류언론의 주특기 중 하나입니다.
황우석 사건을 통하여 많은 사회구성원들이 성찰의 기회를 갖기를 바 랍니다. 잘못을 저지르는 것보다 더 나쁜 일은 그 잘못을 반성하지 않는 것입니다. 무릇 남을 속일 수는 있어도 자신을 속일 수는 없으며, 자기 잘못을 반성할 줄 아는 용기를 가진 사람은 회색인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한겨레 제2창간 독자배가추진단장 홍세화 드림
조용한 어조 속에 묻어나는 점잖은 꾸짖음. 멋진 글이다.
형, 미모사에 깔고 쓰는 애들 많아요~
형, 미모사에 깔고 쓰는 애들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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