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본 영화이고 굉장히 기대하고 본 영화였지만 나오고 나서 굉장히 실망한 영화다. 예쁜 사랑 이야기를 담았을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구성이 예쁘지도 않았고, 보는 내내 지루했으며, 내용도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간단하게 ‘이것은 3류 에로영화다!’라고 결론을 내려버렸으나 혹자가 써 놓은 감상평을 보고 다시 마음이 조금 움직였으니(역시 나는 귀가 너무 얇다. OTL) 심히 혼란스럽다.
[#M_ 문제의 그 감상평 | 닫기
사실 사랑니가 난다고 해서 사랑이 시작되는 것도 아니고, 사랑을 시작한다고 해서 사랑니가 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봉숭아 물이 첫눈 올 때까지 빠지지 않고 남아있으면 첫사랑이 이뤄진다는 식의 감상적인 말도 이따금 사실처럼 느끼고 싶은 것처럼, 사랑니가 난다는 것도 사랑을 불러오는 것 같고 성숙함을 이끈다고 생각하고 싶은 때가 있다.
‘나를 설레게 하는 통증’이라는 카피를 내세운 영화 [사랑니]도 사랑니라는 구치가 주는 통증에 진정한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는 영화다. 과거의 사랑에 얽매여서 추억의 껍데기를 진짜라고 생각하지 말고, 현재의 감정과 대상에 충실한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을 진지하면서도 매우 섬세하게 그려낸 사랑스러운 영화가 바로 [사랑니]라고 말하고 싶다.
<사랑은 추억이 아닌 현재 진행형으로>
여기 첫사랑의 이름과 같다는 이유로 한 소년에게 끌리는 여자가 있다. 30세 ‘조인영’(김정은)이 17세 ‘이석’(이태성)을 처음 봤을 때, 그녀는 자신의 첫사랑이었던 남자와 이름이 같은 이 소년에게 끌리는 감정을 느낀다. 의도하지 않은 곳에서 그 소년 때문에 웃게 되고(학원에서 그래프 문제를 못 푸는 ‘이석’을 혼내던 장면), 그 소년과 같이 자고 싶다고 오랜 친구이자 동거하는 남자에게 말할 정도다.
여기 첫사랑의 얼굴과 같다는 이유로 한 소년에게 끌리는 여자가 있다. 17세 ‘조인영’(정유미)이 17세 ‘이석’(이태성)과 섹스를 하게 되는 것은 순전히 첫사랑임을 깨닫게 되는 죽은 ‘이수’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다. ‘이수’의 쌍둥이 동생인 ‘이석’과 섹스를 나누고 이후 그에게 집착하면서 그 감정이 사랑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첫사랑 ‘이수’와 ‘이석’의 얼굴이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의 본질은 기억 속을 채우고 있는 과거의 이름도, 과거의 얼굴도, 과거의 추억도 아닌 현재의 나와 현재의 상대와 현재의 경험, 현재의 감정에 있다.
30세 ‘조인영’과 17세 ‘조인영’, 30세 ‘이석’과 17세 ‘이석’, 30세 ‘정우’와 17세 ‘정우’. 3개의 이름, 6명의 인물은 각각 30세의 현재 모습이 되기도 하고, 30세의 과거인 17세 때의 3인이 되기도 하고, 30세와 공존하며 현재에 존재하는 17세의 그들이 되기도 한다. 영화는 이름이 같은 사람들이 비슷한 사랑의 과정을 경험하는 것처럼 보여주어 과거 회상 장면처럼 보이게도 하고, 이름만 같을 뿐 전혀 다른 사랑의 과정을 경험하는 것처럼 보여주어 같은 시대에 공존하는 각기 다른 사람들로 보이게도 한다. 그리고 이런 설정이 묘하게 겹쳐지기도 하고 분리되기도 하면서 자유롭고 독창적으로 인물과 시간을 배치한다. 이런 플롯을 잘 따라간다면 영화 시작 후 한시간 동안, 관객은 충분히 각각의 ‘조인영(들)’과 ‘이석(들)’, ‘정우(들)’에 대한 이해와 나름의 해석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한 시간 이후부터 끝까지, 영화는 과연 사랑의 본질은 무엇인가에 대해 말하는 것에 전력을 다한다. 사랑의 본질은 기억 속을 채우고 있는 과거의 이름도, 과거의 얼굴도, 과거의 추억도 아닌 현재의 나와 현재의 상대와 현재의 경험, 현재의 감정에 있다는 것을 촘촘하게 보여준다.
첫째, 30세 ‘조인영’은 실제 첫사랑을 만난 이후 17세 ‘이석’에 대한 감정이 단순히 첫사랑과 같은 이름에 얼굴이 닮은(것 같다고 생각한) 것 때문만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자신의 성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는 첫사랑(30세 ‘이석’)을 바라보던 장면에서 영화 속 흐르던 음악이 끊겨버린 것처럼, 그 순간 첫사랑에 대한 미련이 부질없는 것이었음을 깨닫게 됐고 첫사랑의 그늘에서 완전하게 벗어난다. 그리고 그 만남 직후 학교로 직접 찾아가서 만난 (그 장면에서 유난히 철없는 소년으로 보였던) 17세 ‘이석’을 보면서 첫사랑의 그늘에 잠겨 어린애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자신을 돌아보고 감정의 혼란을 겪는다.
하지만 그날 밤, 밤새 학원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소년 ‘이석’에게 달려가 키스를 한 후부터는 소년 ‘이석’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첫사랑이라는 추억의 잔재가 아닌 현재의 실제 감정임을 확신하게 된다. 그 장면에서 키스를 하는 30세 ‘조인영’이 공중에 떠오르는 장면은 진정한 사랑의 감정을 확신하고 그 설렘과 끌림이 진짜임을 확인한 30세 ‘조인영’의 마음이 붕 떠오르는 것을 몸으로 보여준 매우 독창적이고 사랑스러운 장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30세 ‘조인영’이 첫사랑인 30세 ‘이석’과 만날 때에는 전혀 웃지 않으나, 현재의 사랑인 17세 ‘이석’과 함께 있을 땐 시종 웃음을 멈추지 못하는 설정 또한 그녀가 현재의 사랑이 누구를 향한 것이고 어디에서부터 나온 것인지 깨달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장면들이다. 이 시점부터 영화는 진정한 사랑, 본질적인 사랑이 무엇인지 말하는 것에 집중한다.
둘째, ‘현재의 나의 감정’이 사랑에 가장 중요한 요소임을 말하기 위해, 주변의 비난과 멸시에도 아랑곳 않는 솔직함과 용감함을 보여준다.
30세 ‘조인영’의 감정이 확실해지는 그 밤을 기점으로 문제가 터진다. 바로 그녀와 소년 ‘이석’의 관계를 타인이 눈치채 버린다는 것이다. 이 사건 때문에 그녀는 학원 제자들의 비난을 면치 못하고, 학원을 운영하는 친구에게 미안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런 것 때문에 사랑이라는 감정을 포기하진 않는다. 내가 아닌 주변 환경이 사랑이라는 감정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될 수 없다는 솔직하고 당당한 사랑의 자세를 보여준다.
셋째, 30세 ‘조인영’과 17세 ‘이석’, 현재 사랑에 빠져있는 두 사람은 그들만의 경험을 갖고 있다.
모텔 직원에 대한 소심한 복수로 가져온 화분에서 피어난 꽃이 그것이다. 30세 ‘이석’도 모르고 30세 ’정우’도 모르는 그 화분의 꽃은 현재 사랑을 하는 둘만이 공유하는 경험이다.
넷째, 사랑은 껍데기가 아니라 알맹이, 본질을 갖고 하는 것임을 영화 속 건물을 통해서도 보여주는 것 같다.
‘조인영’과 ‘정우’가 사는 집은 한옥 단독 주택이다. 하지만 내부는 온갖 현대적 시설로 가득하다. 부엌만 보면 보통의 신식 가옥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러닝 머신의 배치는 기발하기 짝이 없다. ‘조인영’이 일하는 학원도 마찬가지다. 겉은 낡은 지하 주차장이 딸린 건물이지만 내부는 화려한 맛이 난다. 겉과 다른 건물의 속 모습은 사랑의 본질은 껍데기가 아니라고 몸소 보여주는 것 같다.
<사랑니의 통증=사랑의 깨달음>
영화의 후반부에 30세 ‘조인영’이 사랑니 통증 때문에 신음할 때마다 그 자리에 있던 30세 ‘정우’, 30세 ‘이석’, 17세 ‘이석’의 얼굴이 한번씩 비춰지는 장면은 그녀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경험하고 느끼게 했던 세 남자들의 모습을 통해 ‘사랑니의 통증=사랑의 깨달음’이라는 공식을 귀엽게 보여주는 듯 하다.
섹스 후에 옷을 세탁기에 돌리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30세의 ‘조인영’은 웃으면서 세탁기 앞에 있고, 17세의 ‘조인영’은 불안함에 울상이었던 것처럼 사랑 앞에 성숙도가 달랐던 두 명, 또는 한 명의 ‘조인영(들)’. ‘다시 태어나면 이석이 되고 싶어’ 라고 말했을 정도로 과거의 첫사랑에 빠져있던 30세 ‘조인영’이 첫사랑의 그늘에서 벗어나 현재의 사랑을 찾았듯이, 역시 ‘다시 태어나면 이석이 되고 싶어’라고 말하는 17세의 ‘조인영’도 그 사랑이 추억이 되어서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면 자신이 사랑의 본질을 품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껍데기만 품고 있는 것인지 깨닫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그 깨달음이 있을 때 그녀 역시 사랑니의 통증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
<섬세한 연출이 돋보이는 여성 영화>
[사랑니]는 섬세한 연출력과 섬세한 감정 연기가 일품인 영화다. 감독 정지우는 전작 [해피엔드]에서 인물들의 감정을 섬세하게 그려냈듯이 두 번째 연출작인 [사랑니]에서도 그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개인적으로 [해피엔드]에서 잊혀지지 않는 명장면은 ‘김일범’(주진모)의 아파트 문을 고함을 치며 두드리던 ‘최보라’(전도연)가 자신이 오해했음에 당황하고 일종의 회한이 뒤섞인 표정을 지으며 차분해지는 장면이다. 한 장면에 다양한 감정을 담고 있고 그것을 완벽하게 소화해 낸 배우의 연기와 연출력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사랑니]에서도 감독의 그런 섬세한 연출력은 여전한 것 같다. 또한 정지우 감독의 두 번째 영화에 여주인공으로 선택된 김정은의 연기에도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 영화는 분명 그녀에게는 배우로서 도전이었을 것이고, 관객의 입장에서도 반신반의하게 만드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사랑의 감정 앞에서 미세하게 움직이는 표정 연기와 차분한 대사의 호흡은 김정은이라는 배우에게 기대할 수 있는 연기의 폭을 넓게 만들어주는 호연이었다고 생각한다.
여성의 (첫)사랑을 소재로 사랑하고 사랑 받고 싶어하는 여성의 욕구를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발에 상처가 났음에도 예쁜 하이힐을 신는 상징적인 모습, 자신에게 이끌기 위해 자동차 경적을 울리고 비싼 음식점에 가면서 어린 소녀와 경쟁하는 모습, ‘너가 수영강사나 트럭 운전사였음 좋겠어’라고 말하며 성적 욕구를 드러내는 적극적인 모습을 통해 솔직하게 정면으로 여성의 성적 욕구를 그려내기에 이 영화는 여성의 입장에서 더욱 세밀하고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그야말로 ‘여성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남성인 내가 느끼지 못했던 섬세한 무언가를 여성들은 느꼈는지 무척 궁금해진다. 노래 가사 하나에도 남성과 여성이 느끼는 부분에 차이가 있듯이 영화 [사랑니]에 대한 느낌도 여성의 느낌과 남성의 느낌이 분명 차이가 있을 것 같다. 사실 이 영화에 대한 기대가 컸기에 감상에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 영화를 보러 가는 순간까지 일체의 기사나 네티즌 리뷰를 읽지 않았는데, 이제 홀가분한 마음으로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 특히 여성들의 감상이 어땠는지 열심히 읽어봐야겠다.
한동안 나는 사랑니라는 영화를 머금고 있는 스펀지가 될 것 같다. 영화 속에 담긴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한 묘사, 장면 장면에 담긴 느낌 등을 머금고 있다가 누군가, 무언가가 툭툭 건드릴 때마다 조금씩 뿜어내는 그런 스펀지로 이 가을이 갈 것만 같다. . | _M#]
나도 참 보수적인 인간인지, 영화 보는 내내 주인공 남녀들이 섹스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모습이 추잡하게만 느껴졌는데 이를 보고 ‘예쁜 사랑영화’라고 평가할 수도 있다니 놀랍기만 하다. 그러나 실제 요즘 세태가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내 기준으로 봤을 때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작태는 아직 우리 현실에서 아무런 부담 없이 받아들이기에는 시기상조인 것 같다. 만일 역할을 바꾸어서 선생님이 남자였고, 17살 고등학생이 여고생이었다면 어땠을까? 아무리 미화하려 해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라고 포장하기엔 조금 거리가 있는 영화가 아닌가 한다.
다만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 감독이 의도한 바를 많이 놓친 것은 사실인 것 같다. 나는 저 감상평 쓴 사람이 발견한 많은 힌트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아니, 눈치챘더라도 그것을 굉장히 유치하다고 폄하했으며 설마 감독이 그런 유치한 방법으로 복선을 깔아놓았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결론을 내리자면, 내용도 이상하고 표현도 엉망인 영화다. 아무리 감상평을 멋지게 써도 영화가 별로인 것은 사실이다. 조금 더 다듬어진 표현과 조금 더 우리 감정에 와 닿는 내용과 대사가 나왔어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