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배고픈 영화인의 고백

팔리지도 않는 시나리오 두 권을 가방에 챙겨 넣는데 뜻하지 않게 어린 딸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참 축복 받은 아이야. 곧 내 방을 갖게 될 거고 내 컴퓨터도 갖게 되니까.” 쓴웃음을 짓는 나는 다녀오마 인사도 못하고 집을 나선다. 사회의 아픈 구석만을 파헤치는 아빠의 못난 시나리오가 기적적으로 영화화되기 전에는 녀석이 자기 방이나 컴퓨터를 가진다는 꿈은 올해도 또 내년에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런 나이기에 외제 차 타며 거들먹거리는 일부 영화인, 수준 이하이면서도 흥행에 성공하는 저질 영화들, 개선되지 않는 스텝들의 열악한 처우에 누구보다 민감하고 숨은 울분도 사무친다. 하지만 그런 모든 것들은 스크린쿼터 축소의 핑계가 될 수 없다. 일반인들이 인식하는 일부 영화인들의 잘못된 모습은 드러난 빙산의 일각일 뿐, 오늘도 수많은 영화인들은 각자의 분야에서 사회와 인간의 삶을 고찰하며 묵묵히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크린쿼터 축소는, 그저 좋아하는 영화 만들기를 통해 사회와 이웃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하는 숱한 영화인들의 활동기반 자체를 없애버릴 것이다.

스크린쿼터가 축소 또는 폐지된다면, 일부 기득권 영화인들과 보이지 않는 투쟁을 벌이며 좋은 영화 만들기에 힘써온 순수 영화인들은 미국영화라는 거대 괴물과도 맞서야 하는 이중고를 치르게 된다. 최근에서야 겨우 터를 닦기 시작한 건전한 영화 발전의 토대는 무너지는 반면 썩어빠진 기득권 영화인들 여전히 미국 영화 배급 시장에 기생해 살아남을 것이다. 그들은 스크린쿼터가 있든 없든 다양한 형태로 자기 배를 불릴 줄 아는 경제적 동물들이다. 결국 영악해 빠진 그들을 향해 쏘아진 여론의 화살에 맞아 죽는 것은 의기와 순수만으로 일하는 대다수 영화인들인 것이다.

나 자신 농민의 아들이며 지금도 아버님은 고향땅에서 농사일을 하신다. 제발 농민들을 핑계 삼아 저주스런 어조로 스크린쿼터 축소를 옹호하는 작태를 멈춰주기 바란다. 이미 고통을 겪은 농민들은 지금 영화인들의 아픔에 동병상련을 느끼며 위로하고 있다. 우리 영화인들도 이후 같은 고통을 겪게 될 각 분야의 투쟁에 기꺼이 동참할 것이다. 정말 농민들의 투쟁과 아픔에 의분을 느꼈다면 지금 농민과 어께를 나란히 하고 투쟁에 나선 영화인들에게 쏟는 무책임한 비난을 거두어주었으면 한다. 스크린쿼터 축소 보다 위해한 것은 언제나 뒷줄에서 헛되게 저주만을 사방으로 퍼부어대는 방관자들인 것이다.

그동안 스크린쿼터 축소를 옹호하는 숱한 주장들을 봤지만 대부분 감정적일 뿐 논리라고는 전무한 것들뿐이다. 그들에게 이성이 있고 기회가 닿는다면 대부분 오분 이내에 설득할 수 있는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논쟁의 궁극은 결국 “자국 영화 소멸되고도 잘 사는 선진국들 많다는데 뭐가 문제냐?” 하는 부분이다. 마치 개인의 선택인 듯도 보이는 주장이라 섣불리 반론을 제기하기 어렵다. 이제 영화인들은 왜 스크린쿼터가 문화주권 사수를 위해 필요한지 스크린쿼터로 얻을 국익이 얼마나 지대한지 타당한 이유를 내어놓아야 한다. 나는 집요한 미국의 스크린쿼터 축소 또는 폐지 강요에서 그 해답을 찾으려 한다.

미국은 뭐 먹을 게 있다고 한국과 스크린쿼터 분쟁을 계속하는 것일까? 실리에 밝은 그들이 한국과 자존심 대결을 벌이고 있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미국은 미국을 능가할 수 있는 한국의 어떤 것을 미리 싹부터 제거하고 싶은 것이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세계인들이 마이크로소프트 워드를 사용함에도 한국에는 아래하 한글이 버티고 있다. 이처럼 한국이 잘하는 그래서 장차 미국을 압도 할 수 있는 것들 중 하나가 바로 영화이다. 소위 ‘영화의 질’에서는 앞으로 우리가 얼마든지 미국을 이길 수 있다. 우리 영화인들은 유능하고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오천년 문화 민족의 후예가 이제 겨우 수백 년, 하나의 나라라고 불리기에도 민망한 미국 패거리의 싸구려 문화에 질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질적 경쟁력은 적어도 아시아 시장에서만큼은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있고 결국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막대한 경제적 효과로 연결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잘 아는 미국은 공정한 영화의 질적 경쟁보다는 자본으로 압박하는 배급시장 장악이라는 승부수를 띄운다. 이 무지막지한 양의 경쟁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스크린쿼터가 유일하다. 어떤 영화진흥책도 스크린쿼터를 대신할 수 없다. 단순 무식한 자본의 논리에는 역시 그에 상응하는 대응이 필요한 것이다.

– 스크린쿼터축소반대운동참가자1 –

그래, 스크린쿼터 축소는 이미 배때지가 불러터진 일부 기득권 영화인들에게도 큰 타격을 주겠지만, 정말 배고픈 영화인들에게는 삶의 희망조차 잘라버리는 끔찍한 타격을 줄 것이다. 가족 안에 심각한 갈등과 모순이 있더라도 그것은 가족 안에서 해결해야 할 일이지, 결코 외부 세력을 끌어들여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아버지가 나를 학대한다 해서 그 아버지보다 더 힘 센 다른 남자를 끌어들인다고 문제가 해결될까? 문제의 본질을 정확히 보아야 한다. “농민들 망했는데 너희만 뭔 특권이냐! 너희도 망해라!” 식의 주장은 문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