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어린이용 소설로 읽어본 여러 소설들을 제대로 한 번 읽어보고 싶어서 고전 소설을 여럿 샀다. 그 중에 걸리버 여행기도 끼어 있다. 특히 ‘무삭제 완역’이라는 문구가 마음에 들었다. 국내에 출판된 소설 중 걸리버 여행기 무삭제 완역판은 이 책 하나 뿐이다. ‘최초’라는 말을 믿어도 된다면 말이다.
우리가 흔히들 알고 있는 걸리버의 소인국, 거인국 이야기 뿐만 아니라, 하늘을 나는 나라와 말들의 나라 이야기가 더해져 총 네 편의 여행기가 펼쳐진다. 사실 하늘을 나는 나라 이야기만 조금 생소할 뿐 나머지는 어렸을 때 읽었던 내용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 다만 조금 더 상세하고 적나라하게 이야기가 전개된다.
가장 마음에 와 닿는 여행기는 네 번째, 말들의 나라 여행기인데 이 부분을 읽다 보면 1, 2, 3편에서 작가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지가 조금은 감이 잡힌다. 인간에 대한 극단적 혐오. 그럼에도 스스로 인간이라는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자괴감. 때로는 소인국에서 거인으로, 때로는 거인국에서 소인으로, 때로는 말들의 나라에서 야만인으로 지내면서 다양한 간접 경험을 통해 인간이 사실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진지한 성찰을 가능하게 한다. 그 과정에서 만물의 영장이라 스스로 뻐기고 있었던 인간이 얼마나 추악하고 별 볼일 없는 존재였는가를 깨닫게 된다. 사실 인간은 냄새나는 야후에 불과하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번역이 다소 부실하다는 것이다. 가끔 전혀 반대의 뜻으로 번역해 놓은 부분도 눈에 많이 띈다. 큰 줄기를 이해하는 데는 지장이 없지만 가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이 보인다는 점이 이 책 최대의 단점이다.
자신이 인간임에 무한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던 당신, 이 책을 한 번 읽어보기를 권한다. 아주 넓고 멋진 신천지가 당신 앞에 펼쳐질 것이다.